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5세 (문단 편집) === 종교적 측면 === >카를 5세는 9년 동안의 부재를 끝내고 독일로 돌아왔으며 교회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있었다. 종교적인 대립은 평화적인 토의에서 논의되고, 개혁들에 대해서도 협의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새 신앙인들을 위하여 [[마르틴 루터]]의 동료이며 친구인 [[필리프 멜란히톤]]은 신앙고백서를 완성하였다. 그것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2 Confessio Augustana}}}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위하여 세계사적 의미를 획득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1530년 6월 25일 제국의회에서 낭독되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인문주의자인 멜란히톤은 항상 타협적인 경향이었고 또한 그 점에서 인문주의자인 프라이부르크의 에라스뮈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새 교리를 실제로는 기존 교회의 교리와 거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사람들은 아직 공통의 기초 관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교회와 신앙의 일치는 누구로부터도 근본적으로 의문이 제기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멜란히톤은 신앙고백서 끝에 이렇게 쓸 수가 있었다. >>"이것은 가톨릭 교리의 총체 안에 들어 있다. 보는 바와 같이 거기에는 저자로부터 알려진 한에서 성서나 가톨릭 내지는 로마 교회와 어긋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논쟁은 신앙이 아니고 단지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 허용, 미사 예물과 사제 홀로 드리는 미사의 폐지, 고해성사 강요, 단식 규정, 수도서원, 주교 재치권 등의 폐지 같은 몇 가지 개혁 요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체재하는 교황 사절 캄페조에게 6월 26일 이러한 편지를 썼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황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 교회와 하등의 다른 신앙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예식에서의 완전히 사소한 차이만이 일치를 방해하고 있을지라도, 교회가 우리를 단죄하지 않는 한 우리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리스도와 로마 교회에 충실하게 머무를 것입니다." >이렇게 화해적인 자세는 재일치를 위한 좋은 토대처럼 보였다. '''황제 자신도 비타협적인 교황주의자는 아니고, 그의 마음의 밑바탕에는 [[에라스뮈스]]적인 뜻에서의 개방적인 인문주의자였기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학자들과 개신교 신학자들로 2개의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의 대변인은 멜란히톤과 에크였다. '''가톨릭에서는 에크·파베르·코흘레우스에 의하여 완성되고, 8월 3일에 낭독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반박서」가 심의의 기초로 결정되었다. 협의에서 양측은 서로 양보하였다. 에라스뮈스의 정신이 모든 참가자들에게서 생동하고 있었다. 즉, 누구보다도 황제가 변호하고 있던 표어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일치를, 타협하겠다는 최대한의 각오, 자신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었다.''' 결국 5가지만이 논점으로 남았는데, 그것은 평신도의 양형성체 허용, [[사제]]의 결혼, [[수도자|수도서원]], 그동안 프로테스탄트 영주들로부터 약탈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 [[미사]]의 제사성 ― 미사 전문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이었다. > >처음 4가지 논점은 교회의 규율과 관련된 것이었고, 마지막 논점만이 신앙과 관계된 것이었다. '''가톨릭에서 양보의 용의가 얼마나 컸는지는, 황제가 1530년 9월 14일 캄페조 교황 사절에게 위에서 지적한 마지막 논점들도 프로테스탄트에게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는 청원과 함께 대리를 파견한 사실에서 가장 잘 확인된다. 교황 사절은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고를 보낸 로마에서는 기대를 걸었다. 교황 클레멘스는 당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인 가예티노 추기경에게 조언을 청하였다. 추기경은 평신도의 성혈 배령과 사제의 결혼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만 규율의 문제이고 신앙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결정은 앞으로의 공의회에서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두 문제는 그때부터 공개토론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멜란히톤은 만약 적어도 이 두 논점에서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 2가지의 양보를 로마로부터 얻어내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에 가서야 그것들을 다룰 시간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어 적어도 평신도의 성혈 배령은 허용되었으나 때는 이미 30년이 늦은 후였다.''' >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일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때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정신은 멜란히톤과 에라스뮈스의 정신이었고, 루터의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파문된 자로서 제국의회에 참석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코부르크 요새로부터 토의 과정을 대단히 정확하게 지켜보았고, 계속된 서신교환으로 자신의 신봉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멜란히톤의 양보에 대하여 그는 신랄한 비난만 하였다. 또한 그는 어떠한 대화도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8월 26일 아우크스부르크로 작센 선제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교리의 일치에 관한 토의에 대해서는 도무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 >August Franzen · Remigius Bämer · Roland Fröhlich. 2001. [[https://www.abebooks.com/9783451268960/Kleine-Kirchengeschichte-Franzen-August-Fr%C3%B6hlich-3451268965/plp|《Kleine Kirchengeschichte》]]{{{-2 (국내 번역명:《세계 교회사》)}}} 한국어판 311-313쪽. 그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사건은 개신교의 출현과 [[종교개혁]]이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지금도 루터교의 기본 교의이며, 가톨릭의 [[트리엔트 공의회]]의 중요성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카를은 일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거의 재위 기간 내내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분투 노력했다. 만약 그가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유럽과 스페인 식민지에서는 훨씬 빠른 속도로 개신교가 확산되었을 것이다. 다만 카를은 제국의 종교적 통합[* 21세기 사람 입장에선 '통합'이 순진무구하게 보일지 몰라도, 카를이 살던 시대엔 서방 그리스도교가 가톨릭-개신교로 분열되어 400년 넘게 이어질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다시피했다. 당대인들에게 이 분열은 과도기적 해프닝었고 (가톨릭 입장에서든 개신교 입장에서든) '올바른 정신으로 통합된 교회'를 위한 역사적 진통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가톨릭측의 카를이나 개신교측의 멜란히톤 등이 통합을 위한 총대를 매려 한 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다.]을 위해 진심전력으로 노력했다. 물론 카를은 분명하게 가톨릭 신자였으며[* 교황들과는 대립했지만, 카를은 교황 개인과 교황의 직무를 분리해서 볼 줄 알았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태도가 간단할지 몰라도, 교황들에게 배신당한 당사자가 카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멘탈이 아닐 수 없다.] 카를이 원한 '통합'은 분명히 개신교가 아닌 가톨릭 편에서의 통합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카를을 광신도였다거나, 비타협적 황제였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면 카를은 [[에라스뮈스]]나 가예티노처럼 가톨릭 진영의 온건파였으며, 이런 면에서는 개신교 진영의 온건파 멜란히톤과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었다.[* 카를이 가톨릭 편을 들었다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건, 당시의 사조{{{-2 (思潮)}}}가 아니라 현대 정치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틀린 것이다. 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경쟁자와 대화하여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비판할 순 없는 것이다.]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멜란히톤이 언명한 두 가지 문제를, 카를은 로마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는 걸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카를은 가톨릭-개신교 양측의 강경파와 달리 제국의 종교적 평화를 구현할 비전이 분명하게 있었다. 비록 이 비전은 루터와 로마의 찬물로 저지되었으나, 이후 역사의 진행[* 1530년 아우쿠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루터교의 기본 교의가 되었고, 가톨릭 평신도의 성혈 배령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허용되었고, 사제 독신제의 경우 오늘날의 가톨릭 신학에서 '예법의 문제일 뿐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한다.]을 본다면 카를과 멜린히톤의 자세가 정답에 더 근접하였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카를의 종교적 비전은 현대적 의미의 관용이 아니며 정치적/군사적 권위를 동반한 것이었으나, 근대 초의 유럽 군주로서 특별히 비타협적이라 볼 이유는 없으며,[* 종교에 정치적 권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인식은 카를 뿐만 아니라 개신교 제후들도 가지고 있었고, 애당초 "Cuius regio, eius religio"{{{-2 (그의 나라에, 그의 신앙을)}}}이라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슬로건부터가 "정치적 권위를 종교에 쓸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한 것이다. 카를만 콕 집어서 비타협적이라 할 순 없다는 것.] 동시대 가톨릭-개신교 양측의 강경파와 비교한다면 상대적으로 충분히 온건하고 대화에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